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중 공방전 (문단 편집) === 조조, 유비 대결하다. === >이때 하후연이 양평(陽平)에서 죽어 태조가 이를 우려했다. 정촉호군(征蜀護軍)으로 임명되어 서황 등을 지휘해 양평에서 유비의 별장인 고상(高詳)을 격파했다. - 조진전 조조가 한중에 도착하기전 조진과 서황이 [[고상]]을 격파한다. >'''(218년) 가을 7월, 군사를 조련하고 마침내 서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중략) >'''9월, 장안에 이르렀다. >(중략) >(219년) 3월, 왕이 장안으로부터 야곡(斜谷)을 나왔는데, 군(王)이 요지를 차단하며 한중에 임하여 마침내 양평에 도착했다. 유비는 험지에 의지해 거수(拒守 - 막아서 지킴)했다. >---- >《정사 삼국지》 무제기 >조공이 장안으로부터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했다. 선주가 멀리서 이를 헤아려 말했다. “비록 조공이 온다해도 할 수 있는게 없을 것이니 내가 반드시 한천(漢川)을 차지할 것이다.” 조공이 도착하자 선주는 군사들을 모아 험고한 곳을 지키고 끝내 교봉(交鋒 - 교전)하지 않자 (조공이) 여러 달이 지나도 이를 점령하지 못하고 도망자가 날로 많아졌다.[* 호삼성은 여기서 나온 '망'은 도망이라고 했다.] >---- >《정사 삼국지》 선주전 218년부터 군사를 일으켜 장안에 주둔하던 조조는 219년 하후연이 참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직접 군사를 일으킨다. 3월, 조조는 장안에서 드디어 야곡을 통해 나와, 군사로 요해(要害) 지역을 차단하고 한중으로 접근했다. 이는 은폐된 요충지를 말하는 것으로 호삼성은 야곡의 길은 험하여 조조는 유비가 길을 끊어버릴까 두려워하여 먼저 군대를 가지고 요해처를 차단하고서 한중으로 나가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소식은 유비에게도 알려졌으나 유비는 기세에 고무되어 그랬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자신만만했다. 장안에 있던 조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유비는 조조가 오더라도 아무것도 못 할 것이며 자신이 한중을 차지할 호기라 봤다. 즉, 하후연이 죽고 한중의 요충지를 대부분 유비가 손에 넣었으니 이미 한중쟁탈전은 유비군의 승리로 끝난것이나 다름없고 요충지만 굳건히 지키면 교전을 할 필요도 없이 조조는 와 봤자 할 게 없어 철퇴한다는 것이었다. 조조의 친정은 '''"설령 조조가 직접 온다 하더라도 한천은 반드시 내가 차지하고야 말겠다"'''라며 유비의 자신감만 불타게 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이 한중공방전이야 말로 '''조조와 유비 이 두명의 영웅이 동등한 역량을 갖춘 상태에서 벌인 처음이자 마지막 대결'''이었고 그 옛날 낙양에서 우연히 만나 30여 년에 걸친 세월을 건너 수많은 인연을 겪었던 두 사람의 '''마지막 싸움'''이었기도 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조는 그 동안 유비를 자신에 필적하는 영웅이라고 보면서도 그동안의 불안정한 유비의 기반과 군사력, 그가 유비를 패퇴시킨 전적을 돌이켜보고 무의식적으로 유비는 내가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내면에 있었던 듯 싶다. 적벽부터 시작된 위의 허세 발언들도 그렇고. 반면 유비는 수차례의 패배로 인해 조조의 역량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조조가 오더라도 아무것도 못할것이라는 발언은 그만큼 이제서야 동등한 위치에 선만큼 필승의 각오로 한중을 손에 넣겠다는 각오로 임하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선주(유비)가 조공(曹公)과 함께 다툴 때 형세가 불리했다. 의당 퇴각해야 했으나 선주가 크게 화를 내며 퇴각하려 하지 않으니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데 법정이 선주의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선주가 말했다,“효직은 화살을 피하시오.” 법정이 말했다, “명공께서 친히 시석(矢石- 화살과 돌)을 당해내시는데 하물며 소인이겠습니까?” 이에 선주가 말했다, “효직, 내가 그대와 함께 물러나겠소.” 그리고는 퇴각했다. >---- >《정사 삼국지》 법정전 주석 야곡을 통해 한중에 당도한 조조는 곧이어 유비의 본대와 조우했다. 험준한 곳을 방어하며 지형의 우세함을 이용해 끝내 교전을 하지 않고 끈덕지게 버티는 유비와 어떻게든 교전을 통하여 유비를 몰아내려는 조조와의 대치국면이었다. 유비는 교전을 하지 않고 조조를 제풀에 물러가게 할 마음이었지만 조운이 벌인 전투 등 일단 한번 벌어진 교전들은 대단히 치열하였다. 법정전 주석에 따르면 실제로 바로 유비의 군영 근처에서 화살이 떨어지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코 후퇴하지 않고 지휘를 했었다고도 하니 그 치열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비군이라고 마냥 싸우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었고 먼저 도발하거나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실제 위서 [[조창]]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유비는 산 위에 주둔하면서 [[유봉]]을 내려보내 싸움을 걸었다. 조조가 분노하여 욕하며 말하길 >[[유비|돗자리나 짜던 작자]]가 감히 가짜 아들(=유봉)을 보내 나에게 맞서는가. 내가 황수아(=조창)를 불러 너를 상대할 테니 기다리거라. 라고 했다. 유비군이 조조군에 맞서 먼저 공격하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록되진 않았지만 두 진영 사이에 여러 교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비군이 조조군을 공격한 또 하나의 일례로 조조의 보급을 노려 원정 온 조조군의 역량을 약화시키려고 조조 진영을 공격했던 것을 들 수 있는데 조운별전에서 그 숨막히는 상황의 일부를 볼 수 있다. >하후연이 패하자 조공(曹公- 조조)이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군대가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려 했다. >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圍- 군사시설의 일종)를 나와 황충 등을 마중하며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때마침 조공(曹公)이 양병(揚兵- 거병; 군세를 떨침)하여 대거 출전하니 조운이 조공의 전봉(前鋒)에 의해 공격받아 바야흐로 싸우는데 적의 대군이 도착하여 형세가 핍박되자 적진에 전돌(前突-돌진)하고 한편으론 싸우며 한편으론 물러섰다. > >조공의 군(조조군)이 패했다가 다시 합치니 조운이 적을 무너뜨리고는 위(圍)로 달려 되돌아왔다. 장수 장저(張著)가 상처를 입자 조운이 다시 말을 달려 (적의) 영(營)으로 되돌아가 장저를 맞이했다. 조공의 군이 추격해 위(圍)에 이르렀다. > >이때 면양장(沔陽長) 장익(張翼)이 조운의 위(圍) 안에 있었는데 장익이 문을 닫고 막아 지키려 하였으나 조운이 영(營)으로 들어와서 다시 문을 활짝 열고는 깃발을 내리고 북치는 것을 멈추었다. 조공의 군은 조운이 복병을 두었을까 의심하여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 >조운이 하늘을 뒤흔들 듯 북을 울리며 오로지 뒤에서 조공의 군에게 융노(戎弩)를 쏘아대니 조공의 군이 놀라고 어지러워져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았고 한수(漢水)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선주(先主)가 다음날 아침 조운의 영위(營圍)로 친히 와서 전날 싸운 곳을 둘러보고 말했다. > >“자룡(子龍)은 일신이 모두 담덩어리(膽)로다.” 음악과 술자리를 베풀어 저녁까지 이어졌고, 군중(軍中)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 범 같은 위용을 갖춘 장군)이라 했다. >---- >《정사 삼국지》 조운별전 당시 조조는 북산인근을 목적으로 한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실행했다. 이에 유비는 황충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습격하게 하고 조운에게 보조를 맡겼는데 마침 기한을 넘겨도 황충이 돌아오지 않자 뭔가 문제가 생겼으리라고 보고 북산으로 황충을 전송하다가 조조군의 대군과 조우했다, 불과 수십 기의 기병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조운은 능수능란하게 기병을 가지고 조조군에 돌격하여 대형을 흐트리고 정신차릴만하면 다시 공격하면서 여기저기서 기동전을 펼쳐 조조군을 당황하게 하고 뜻밖에 돌진에 당황한 조조군을 상대로 아군까지 구출하면서 진영으로 돌아가기까지 했다.[* 애당초 조운의 군 커리어 시작이 북방의 기마술에 능한 이민족이 포함된 군세를 다루는 기병대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조운의 기병운용도 이해가 간다.] 이에 조조군이 다시 추격했는데 조운은 오히려 공성계를 펼쳐 후퇴하려는 조조군을 상대로 화살비를 쏟아부어 조조군을 대파한다. 이후 기록을 보면 유비와 조조는 서로 진영을 지켰고 조조는 유비진영을 함락시키지 못하니 산발적 교전 외엔 대치국면만이 한달 가량 지속되는 상황에서 조조군은 도망자가 날로 늘어났다. 대치로 인해 조조의 군대 장악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조조는 회군하고자 생각하며 '''계륵(雞肋- 닭갈비)'''이라 영을 내렸다. 이에 다들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양수가 군장을 꾸리자 어찌 회군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았냐며 사람들이 놀라 묻자 양수는 대답했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먹기에는 얻을 것이 없는것, 그것이 계륵입니다. 그것이 한중이니, 왕께서는 회군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 >《정사 삼국지》 구주춘추 ---- >'''여름, 조공은 과연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선주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 유봉(劉封), 맹달(孟達), 이평(李平)[* 개명한 이엄이다. 그러나 삼국지집해에 인용돤 조일청의 글에선 '이엄전에서 이엄이 평(平)이라 개명함은 후주 건흥 8년으로, 이때는 아직 이름이 엄(嚴)이고, [[한중왕표]]의 대열에서 받들며 여전히 엄이라 하니, 대응되지 못하고 가지런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 그리고 이엄전에서 또한 신탐(申耽)을 공격한 일이 없으니, 이는 다른 사람으로 의심된다'고 하였고 반미가 이르길 '이엄은 건안 19년에 건위태수(犍爲太守)가 돼, 장무(章武) 2년에 이르러 징소돼 영안궁(永安宮)에 이르렀으니, 응당 유봉, 맹달이 상용을 공격할 때, 이엄은 계속 건위에 있었다. 촉에서 또한 두 이평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으니, 아마도 이는 군더더기 글자다'라고 했다.] 등을 보내 상용(上庸)에서 신탐(申耽)을 공격했다.''' >---- >《정사 삼국지》 선주전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유비는 계속 그곳을 지키면서 수뇌부까지 위험에 빠질 때까지 싸움을 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이미 하후연을 격파하고 얻은 지형의 우위를 통해 버티니 조조군의 도망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야말로 수년 전 한중을 정벌할 때 양평관에 있던 장위군과 맞싸우던 상황과 유사했으나 장위의 지휘와 달리 강성한 유비군을 상대로는 이를 패퇴시키기가 어려웠다. 이에 조조는 아직 자신이 관할하고 있던 한중 부분의 민호 5만을 이주시켰으나 그렇다고 전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사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교전을 응하지 않았다 나오긴 하는데 그것도 정사 삼국지 저자 진수가 조조를 위해 좋게 써준 말에 불과하고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다른 사서들에는 멀쩡히 격렬한 교전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나오는 데다가 심지어 유비가 양자 유봉을 시켜 조조에게 먼저 싸움을 걸며 도발하자 조조가 격노하면서 '유비 이 돗자리 장수놈이 가짜 아들로 감히 나한테 시비를 걸어? 내 아들 조창이 오기만 하면, 유비 너 가만 안 놔둔다'라며 당장은 못 싸우고 부들부들거리기만 하는 상황도 나온다. 이게 얼마나 조조가 수세에 몰린 상황이냐면 이후 조조가 진짜로 북쪽에 있던 조창을 불러서 지원하게 하려 했는데 조창이 밤낮으로 달려가 한중에 도착하기도 전에 조조는 더 견디지 못하고 철수해버린다. 즉, 저 발언은 유비의 도발에도 싸울 생각은 못하고 열받으니까 빡쳐서 내뱉은 말이라는 것. 애초에 싸움이 아예 없었다면 조조가 회군을 결심할 정도로 그토록 많은 병사들이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5월(자치통감), 조조는 [[계륵]]이라는 말만 내뱉고 매우 많은, 대부분의 병사들이 도망가 버린 피해를 입은 채 제군을 이끌고 한중에서 철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변을 지키던 조홍과 조진에게는 진창 방면으로 물러나라고 했으며 혹시나 모를 유비의 한중 북쪽 진격을 막기 위해 장합, 곽회, 두습을 배치하여 대비하게 했다, 그동안 조조가 직접 지휘한 전쟁에서 무슨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 정면전에서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장과 정벌했던 땅까지 잃으면서 물러나야 했던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유비는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고 내친 김에 양자 [[유봉]]에게 한중군에서 출발해 면수를 타고 내려가게 하고 형주 의도태수 [[맹달]]에게는 북진을 명하여 방릉, 상용, 서성까지 격파. 그곳을 차지하고 [[신탐]]에게는 영상용태수, [[신의]]에게는 영서성태수 직을 내림으로써 추가적으로 전리품을 더 획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